왜 피해자는 말이 없을까

2019-08-09

 

 

<왜 피해자는 말이 없을까>

 

예은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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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없어지고 있었다. 

 

'은지 없는 날만 나올게요', '은지 없는 대회는 나갈게요'

그 말대로 나도 모르게 없어지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동아리방에 들어갈땐 동생의 등뒤에 서서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내주길 기다렸으며, 피해사실을 이야기하다가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해도 입을 다물었고,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나서도 '이거 비밀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없어지고 있었다.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은 '관심병', '억세다' 는 말로 치부되는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리고도 결국 이 일은 은밀한 일에 그치게되었다. 수십명에게 같은 얘기를 해도 이 피해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않는 느낌에 오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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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JTBC 청춘시대2

 

JTBC 드라마 <청춘시대>에서는 헤어진 연인에게 데이트폭력을 당하는 '예은'이 등장한다. 시즌2에는 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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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했다. 또래여자들과 인바디를 재면 상대적으로 높은 근육량 수치를 보고 우쭐해했고, 도예를 하며 무거운 흙을 옮겨야할 땐 앞장서곤 했다. 격기 운동 두 가지를 상당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고, 생활체육 대회에서 선수라는 단어를 이름 옆에 붙이며 메달도 자주 땄다. 적당한 체구의 남성은 스스로 제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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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 드라마를 사랑하고 캐릭터들의 심리에 늘 공감했다. 그러나 예은이가 가해자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모습, 가해자가 징역형을 받았음에도 심하게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을 보며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예은이 약한 사람이기에 더 두려워하고, 그 이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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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은이처럼 감금을 당하거나 폭행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인 남성이 내 주변을 배회한다는 사실만으로 집밖에서 심하게 주변을 두리번 거렸고, 눈 앞의 글자들을 읽지 못했다. 소화 시키지 못한 음식들을 토해냈고, 동이 틀때쯤 잠에 들었다. 겨우 잠들고 나서도 가해자가 나오는 악몽을 연달아 꿨다. 사람들이 빽빽한 도서관에서도 책꽂이 사이에서는 혼자라는 기분에 공포감을 느꼈고, 모르는 남성의 얼굴을 보면 역겨움이 일었다. 동아리 동생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투명비닐백에 선물을 담아온 날에는 가해자가 나에게 주겠다고 들고오던 비닐백을 떠올렸고 몸에 소름이 올랐다. 그렇게 좋아하던 전시회도 꺼리게되었고, 전시글들을 보면 가해자를 떠올렸다. 울면서 잠에 들고도 왜 이렇게 얼굴이 부었냐는 말에는 또 말을 아꼈다.​

이제서야 예은이 왜 그렇게 숨어야했는지 안다. 예은은 약하지 않았다. 나 또한 약해서는 아니었다. 가상의 인물에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가해자는 자신의 의사로 가해자가 되기를 선택했다. 스토킹 범죄를 부끄러워야할 사람은 가해자이다. 사실을 숨기려고 애쓴다면, 그래야 할 사람도 가해자이다.

​나는 피해자이나 피하지않을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있는 곳 그 어디에도 설 자격이 없다.

예은은 연대한다. 하우스메이트들의 도움을 받아 범죄 상황에서 탈출하고 가해자를 응징한다. 나 또한 내 상황을 지켜봐주고 함께 해줄 사람들이 생겼다. 이제는 고마움에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없는 자리에 자신이 있어도 된다는 가해자의 오만에 나는 없어지지 않으려한다. 다시 계정을 공개상태로 전환했고, 실명을 거론하며 도움을 청할 것이고, 체육관에 쭉 서있을 생각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없어지더라도, 그 곳이 가해자가 설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