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꽃이 피었다, 말하는 것
    은지/글로그 2020. 3. 31. 14:26

     

     

     

     

     

    아빠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도로 가에 촘촘히 핀 벚꽃을 보며 '벚꽃이다' 라는 말이 입을 열기 직전까지 나왔는데, 문득 그 말을 내뱉는 것과 혼자 꽃을 보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뇌는 반복을 지루해합니다. 반복에 권태를 느끼고, 권태는 고통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요근래에는 보기 좋은 일상들 사이에 범죄 사건이 떠밀려 왔습니다. ‘n번방’이라는 단어 옆에 잔뜩 달린 수많은 해시태그가 불편한 사람도, 스토리를 넘길때마다 빨간 문장들의 반복이 피곤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사실은 알고 있을 것 입니다. 이것이 특정 사람들의 유난스러움에서 비롯했는지, 아니면 이 문제가 진정으로 있어야할 곳을 찾아 떠나가길 바라는 위급한 마음으로부터 왔는지 말입니다.⠀

    저도 주변사람들의 계정에 늘 행복한 소식만 가득하길 바랍니다. 미간을 찌푸리게 하는 성범죄 얘기가 떠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함께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닿습니다. 작년 11월 ‘단독’이라는 단어를 걸고 한 일간지 1면에 n번방 사건이 보도된 이후에도 성착취는 계속되었습니다. 7개월 이상 남은 미국 대선 이야기에 한 지면을 내어주는 신문에도, 헐리웃 배우가 SNS에 올린 영상을 보여주는 뉴스에도, 국내에서 70여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성범죄 사건은 자리하지 못했습니다. 위급한 마음들이 출발한 지점입니다. ⠀

    연대는 잘못이 없습니다. 오히려 확실한 힘을 발휘합니다. 200만명이 모이고 일주일동안 1천개가 넘는 관련 기사가 쏟아졌습니다. 작년 11월 n번방 가담자가 징역 1년을 받아도 항소하지 않던 검찰은, 지난 주 합당한 처벌을 받게하겠다며 변론재개신청을 했습니다. 국회에 상정된 아청법 개정안이 2년 동안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국회의원 너도나도 관련 법률들까지 다 개정하겠다고 합니다. 성범죄 재판마다 양형 논란이 있던 판사는 주범의 재판에서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연대는 잘못이 없습니다. 누군가를 피곤하게 했다면, 그것은 지속적인 연대 때문이 아닙니다. 범죄 작태의 혐오스러움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

    집단적 성범죄에 일그러졌던 70여명의 삶이 누군가에게 지루함 혹은 권태로 느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n번방' 이라는 글자가 친구의 SNS 속에서 계속 머문다면, 그 글자가 또 다시 언론의 글과 영상 그리고 국가의 의제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글이 쓰이는 공간은 셀 수 없이 많은 SNS 계정 중 특별할 것 없는 한 칸입니다. 그럼에도 제 옆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칸을 채워 무어라 적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고개를 돌리게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손글씨를 쓰고 자판에서 # 을 찾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빠 벚꽃이야.”하니 생각대로 아빠가 고개를 돌려 길가를 바라봤습니다. 깨우고 또 깨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꽃을 보고 "꽃이 폈다" 했을 때 옆사람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추울 때 "춥다" 하면 같이 걷는 사람에게 우연히 손난로를 건네받을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자극에 표현하는 사람이길 바랍니다. 그것이 안 좋은 자극일수록 더더욱이요. ⠀

    피해자는 일상으로, 가해자는 감옥으로, 그리고 n번방 문제는 tv와 신문으로, 국회 탁상 위로 떠나가길 바랍니다. 영영 떠나 법정에서 발가벗겨지기를 바랍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