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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희의 윤희되기 (3) – 윤희, 프레임 밖으로 나가다
    은지/글로그 2020. 6. 10. 23:19

     

    <윤희의 윤희되기>

    1. 임대형 감독의 영화 <윤희에게> https://writeeun.tistory.com/39
    2. 숨김의 대상과 가까워지기  https://writeeun.tistory.com/41

     

     

     

     

    3. 윤희, 프레임 밖으로 나가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 속 구절은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매력적인 글귀이다. 1919년도 작품의 구절이 여전히 인기 많은 인용구로 사용되는 것은 많은 삶을 관통하는 원리를 담고 있어서다. 윤희의 삶 또한 그렇다. 헤르만헤세의 새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해 보인다. 첫 번째로, 알 속에서 자신이 새임을 자각해야한다. 두 번째로, 알 속에서 나와야한다. 그래야 새는 새가 된다. 앞서 밝힌 것처럼 윤희는 억눌러왔던 진짜 자신을 확인하는 첫 번째 과정을 훌륭하게 완수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두 번째 임무를 용감하게 수행한다. 자신을 억누르던 시스템에서 벗어나 자신 세계를 창조하는 길을 차분하고 명확하게 걸어간다.

     

      영화는 ‘닫힌 구도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이 과정을 표현한다. 극 초반 다수자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삶을 사는 윤희는 일련의 프레임 속에서 제시된다. 첫 등장에서 그가 정류장의 뾰족한 울타리들과 정류장의 기둥, 얇은 나무 사이 공간에 비좁게 서있다든지, 배식구의 직사각형 안에서 분주히 일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윤희가 일과를 마치고 담배를 피울 때조차 관객이 답답함을 느꼈다면 이와 같은 이유이다. 그는 길쭉한 전봇대, 폐건물의 기둥, 도로 반사경 온갖 세로선 사이 좁은 공간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이 프레임들은 윤희가 관객에게 후련함을 제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되레 그의 공간을 옭죈다.

     

     

      윤희와 인호가 아파트 복도에서 대화하는 장면 또한 그렇다. 둘은 직선 속 아파트에서 작은 두 객체로 존재하고, 윤희가 퇴근 후 편지를 발견하는 씬조차도 영화는 윤희를 아파트의 투명한 유리문의 프레임 속에 가둬놓는다.

     

      앞서 밝힌 것처럼, 편지는 영화의 엄청난 무기이다. 청각적으로 영화를 끌고 가는 장치이자, 시각적으로는 영화의 씬들을 연결하는 소재이고, 주인공에게는 결심의 계기이다. 윤희를 가두던 일련의 프레임들은 편지가 개봉된 이후 권위를 잃는다. 통근 차량 창문에 비치는 윤희의 얼굴은 창문의 프레임에 갇혔다가도 차량이 윤희를 두고 떠나면서 그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서 해방된다. 그가 서있던 정류장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기찻길을 걷는 등 그는 자신이 살아온 프레임을 거침없이 버리기 시작한다. 앞서 프레임이 있는 공간이었던 급식소에서 탈주하며 그는 알을 깨며 새가 될 준비를 마친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 인호와 마주하는 장면에서 그는 완전히 알을 깨부순다. 극 초반과 같이 아파트의 프레임 안에 들어온 둘은, ‘줄 게 있으니 나가자’는 인호의 말에 의해 그들은 좁은 프레임의 밖으로 말 그대로 나가버린다. 사회가 규정한 사랑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윤희를 정체성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프레임은 ‘사진’이다. 극 초반에 삼촌의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 새봄에게 삼촌이 포즈를 지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윤희에게는 오빠인, 새봄의 삼촌은 윤희의 정체성을 폐기하려했던 주체이다. “왜 엄마 얘기를 삼촌한테 물어봐?” 라는 그의 대사에서는 그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프레임 속에 윤희를 넣은 주체이지만 정작 윤희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인다. 윤희 또한 여행에서 돌아와 오빠의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는다. 무표정의 윤희가 찍힌 뒤, 증명사진의 프레임 안에서 윤희가 일어나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씬은 얼핏 보면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진정 윤희와 이 영화가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은 이 씬을 구성하는 단 몇 초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폐기하려했던 가족의 틀 안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에 오빠는 언성을 높이고 안경을 벗는 등 위압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지만 윤희는 이제 자신의 주체이다. 지배자의 프레임인 사진관을 또 한 번 박차고 나간다. 사진관 창문의 프레임 안에 홀로 남은 오빠는 머리조차 지워져 비춰진다. 윤희는 적극적으로 정체성에 폭력을 가한 주체를 삭제하며 자신을 구속한 체계에서 탈출한다.

     

     

      이와 달리 사진관 이외의 공간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 것으로 이해된다. 엄마의 과거 사랑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난 새봄이 윤희를 찍는 장면들이 특히 그렇다. 끊임없이 쥰의 공간인 오타루에서 새 프레임 속에 윤희를 넣으며 윤희가 억눌렀던 자신의 소수성을 되찾는 것을 돕는다. 이내 윤희는 어색하게 기찻길에서 새봄을 찍으며 자신 세계 안에 인물들을 들여놓기 시작한다. 마침내 새봄의 졸업식에서 카메라를 든 윤희는 편안하고 능숙하게 새봄을 담는다.

     

      이렇듯 영화는 프레임 밖으로 윤희를 꺼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윤희가 자신 세계를 만드는 과정을 다시 프레임을 이용해 제시한다. 즉, 윤희를 다시 닫힌 구도 속에 넣으면서 그를 완성한다. 기존에 차창이 프레임 역할을 한 것처럼 이사를 가는 장면에서 차창 안에 함께 담긴 모녀의 얼굴이 그렇다. 또, 이력서를 쓰는 장면에서 카페 큰 창 안에 위치한 윤희가 특히 그렇다. 오빠를 지우고, 전 남편과 완벽히 이별한 윤희다. 이렇게 ‘표준화’의 ‘객체’로서 살기를 포기한 윤희는 ‘비표준화’의 ‘주체’로서 새로 태어났다. 그 삶 안에 채워 나가야할 것이 많음을 나타내는 듯, 프레임인 창 안에 햇살이 들어오고 외부 풍경 외에 그의 프레임 안에는 담겨있는 것이 없다. 이때 직사각형 안으로 새봄이 들어오고, 둘은 한 세상 안에 존재한다. 영화의 시선이 밖으로 이동하고, 창 안을 조망하는 샷에서 전봇대조차도 이 둘 사이를 가르지 못하고 그저 프레임 외부에 존재한다. 이러한 의도는 사진관 씬에서도 투영된다. 충분히 같은 평면에 제시 될만한 오빠와의 대화에 카메라는 구지 시선을 비틀어 윤희를 창문 앞 프레임에, 오빠를 사진관의 벽 앞에 존재시킨다. 윤희가 선택한 세계와 그 외부 세계를 구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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